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정현종, 시 '방문객' 중에서
최근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 82년생 김지영의 이야기는 사실 그다지 특별하진 않다. 공상과학이나 판타지 소설이 아니다. 기상천외한 발상에 바탕을 둔 이야기가 아니라 담담하게, 지극히 여자의 시선으로 여자의 삶을 그렸을 뿐이다. 현재시점 기준으로 보면 초등학교 저학년 부모가 되어있는 우리나라 여자의 지나온 성장 스토리이다. 어렸을 적 남동생과의 차별대우 경험, 초등학교 시절 남학생과 여학생으로 나뉘어 대우받았던 모든 경험들, 사춘기시절 학교에서 공공연히 자행되던 선생님의 성희롱과 성차별, 성인이 되고나서는 직장에서 받아야만 했던 차별대우, 아이를 낳으면서 겪었을 이야기들이다. 딱 그나이 여자들이라면 공감할 만한 여자들만의 경험을 있을 법한 이야기들로만 묶어서 써낸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이야기들을 읽고난 후 느껴졌던 가장 큰 감정은 바로 아내에 대한 미안한 감이었다. 아내는 얼마전 일을 시작했다.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세시간만 일하면 되는 Part-time Job이었다. 오전 근무를 마치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유치원,학교를 다녀온 아이들을 돌보는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은 날, 아내와 나는 이런 대화를 했다.
"결국 이런 일 하려고 내가 중국에서 3년간 공부하고 온건지... 기분이 좀 그러네. 학비 지원해 주신 부모님한테도 미안하고"
"조금 하다가 힘들면 관둬도 돼. 그런 일은 잠시동안 하고, 앞으로 좀 더 준비해서 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게 좋을 것 같아"
아내라고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까? 아니다. 9살, 6살 아이들을 키우는 전업주부를 흔쾌히 채용해 줄 그런 회사가 과연 있을까? 있다 하더라도 얼마나 많을까? 과연 남자들이 생각하는 대로 열심히 노력하면 들어갈 수 있기는 한걸까? 나이가 들었고, 게다가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직장 생활시절 배웠던 업무스킬들은 잊혀져 가고, 그런 상황에 아이들 학비, 생활비를 점점 늘어만 가고, 남편에게만 생계의 부담을 지우는게 싫고... 결국, 그런 고민끝에 아내는 '그나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아내라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지 않을까? 부모님이 기대한만큼 멋진 모습으로 부모님 앞에 서고 싶지 않았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세상의 벽이 높게 느껴졌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내가 느꼈을 괴로움의 한 마디를 듣고 별 고민없이 "힘들면 관둬도 돼" 라고 한마디 던졌던 게 너무나 미안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난 후 그간 아내가 살아오면서 느껴왔었을 감정, 겪어왔었을 일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책에 등장하는 김지영씨의 남편이 무던하게 내뱉던 말들이 나도 한번쯤을 했었을 말이란 생각을 하니 미안한 감이 더 들었다. 그리고, 아내가 무언가 한 마디를 할때는 그냥 순간적인 감정과 판단을 통해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그런 삶을 지금까지 살아오고, 그 과정에서 겪었을 부당함에 대해 좌절하고 분노한 경험을 속에 담아내면서 살아온 끝에 하는 묵직한 '한마디'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정현종 시인의 시에서처럼 "한 사람이 한 마디를 할 때에는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담고 하는 말" 이란 생각을 했다. 전쟁을 겪은 세대가 북한, 빨갱이, 김일성, 김정일을 욕할 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듯이 말이다. 전쟁을 겪으면서 가족들을 잃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피눈물을 흘려본 그들이 하는 말이,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하는 말과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82년생 김지영'이 최근 남자들의 불편한 감정을 자아내고 있다. 이른 바 '꼴통페미' 의 글이라고 매도 당하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전 그런 분노를 가진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여 몇몇 누리꾼들의 글을 읽어 보았다. 남자들이 느끼는 불편함이란 것이 어떤것인가 알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들의 분노는 여자들 못지않게 남자들이 느꼈을 불편부당함에 대해서는 왜 알아주지 않냐는 서운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별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는 표현한 것에 대한 섭섭함도 있었다.
같은 남자이지만 누리꾼들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아, 이런 면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남자들도 여자들 못지않게 고정된 성역할 (남자는 이래야 한다라는)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이 많겠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고통이 여자들만 있었겠느냐? 남자들의 고통이 여자들의 그것보다 덜하겠느냐는 것이 이 책을 읽고나서 느껴졌던 남자들의 불편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남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너희들은 누릴만큼 누리지 않았느냐?", "왜 현실을 부정하려 드느냐?"며 분노할 여자들도 있을 것이다. 양쪽 다 사회가 강요하는 남자다움, 여자다움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나는 이런 여자들과 김지영 이야기에 분노감을 표출하는 남자들, 양쪽 모두의 말이 그들 스스로에게는 정의에 바탕을 두고 있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말들을 부정하고픈 마음은 없다. 다만, 서로 조금씩 더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면 어떨까 싶다.
내가 말하는 노력이란 앞서 말했듯이 "어떤 한 사람이 한 마디를 할때에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통해 느껴왔던 감정을 바탕에 둔 한 마디라는 생각을 해보려는 노력"을 말한다. 정현종의 시에서처럼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냥 한 사람이 이 곳에 왔다는 사실인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같이 오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 말을 할 때에는 나는 미처 다 이해하지 못할 그 사람의 인생의 경험과 느낌에서 나온 한마디라는 생각을 하려는 노력을 했으면 한다. 남자들이 여자들을 욕을 하고, 여자들이 남자들이 만든 사회를 탓할 때 서로 욕을 할 것은 우리 서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보다는 그들이 처한 환경을 이해해 주고, 그런 환경을 만든 고정관념을 깨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깨달아야 했으면 한다.
남녀간에 싸움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남자다움,여자다움' 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을 향한 싸움을 해야한다. 고정관념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함께 뭉쳐서 그들에게 싸움을 걸었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나의 소중한 6살짜리 딸아이가 나중에 '82년생 김지영' 을 읽고, '아, 이런 시대도 있었구나' 하며 소설을 정말 소설처럼 받아들일 날이 올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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